말괄량이 길들이기

 

《말괄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
김솔이, 유아연, 이나하, 이은솔, 장도은, 한솔, 황예지

Sollee Kim, Ahyeon Ryu, Naha Lee, Eun Sol Lee, Do En Jang, Sol Han, Yezoi Hwang

2022.03.04. – 04.13.

기획/ 글: 허호정 Hur Hojeong
일러스트레이션, 그래픽 디자인: 김주희 Juhui Kim
설치: 정진욱 Jinwook Jung

주최: 뮤지엄헤드

 

 

말괄량이는 여자에게(만) 붙는 말이다. 말괄량이는 누구인가? 거칠고 고약하며 날카롭고 종잡을 수 없는 여자, 제멋대로에 하고 싶은 것은 해내고 마는 여자, 시답잖은 일에 매달리는 부주의하고 미숙한 여자? 말괄량이는 입체적이고 파괴적인 인물로 상정되는 듯하지만, 이내 다뤄봄직한 길들이기의 대상으로 납작하게 조정된다. 지난 몇 년 새 사회에 일격을 가하고 열기를 불어넣었던 페미니즘은, 상흔과 잔상을 남기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어느새 페미니즘은 말괄량이로 취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자들’의 느슨한 친목 모임, 유행과 처세에 능한 이들의 액세서리, 파벌 다툼과 세력 확인의 도구쯤으로 여겨지며 조롱과 괄시의 대상이 된다. 오래된 미래와 때 이른 종언 사이에 선 동시대 한국 페미니즘은, 결국 길들여지게 될까?

 

전시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에서 출발한다. 극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먼저, 동네에서 성미가 괴팍하기로 유명한 ‘말괄량이’ 첫째 딸, 카테리나 미놀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옆에는 모든 게 정반대인 동생 비앙카 미놀라가 있다. 길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결혼 상대로 고려되지 않는 언니와 달리 비앙카에게는 구혼자가 줄을 잇는다. 동네 남자들은 카테리나가 혼사를 치르지 않으면 동생의 혼사도 불가능하다는 미놀라 영감의 말에 계략을 꾸미고, 혼인지참금만 있으면 어떤 여자도 괜찮다는 남자 페트루치오를 데려온다. 남자는 말괄량이를 “신부의 덕목”을 갖춘 ‘여인’으로 만들기 위해, 괴팍한 여자를 더 괴팍하게 다룬다는 논리로 감금, 금식, 폭언을 동원한다. 그렇게 극은 억지스러운 결혼을 향해 전진한다.

 

말괄량이 카테리나는 결혼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혼인의 제물로 만들 셈이냐며 대들고, 남자들이 자기 몸을 건드릴라 치면 도구를 휘둘러 혼을 내거나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그는 존재 부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거듭 좌절했다. 끝내 페트루치오의 부인이 된 카테리나는, 극의 마지막 장에서는 과장된 고백조로 긴 독백을 읊는다.

 

“[…] 왜 우리의 육체가 부드럽고 연약하고 매끄러워서 세상의 노고와 고생을 견디는 데 적합하지 않은 걸까요? 그건 우리들의 체질과 감정이 외양과 똑같게 부드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네,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콧대만 높지 별것도 아닌 존재들이에요! 저도 지금까지는 당신들처럼 마음이 거만하고 간은 부었고 꽤나 까다로워 일일이 대꾸를 했고 이맛살을 찌푸렸죠. 그러나 이젠 우리들이 휘두른 창이 기실 지푸라기에 불과했고 우리의 힘은 약하디 약해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우를 범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무리 우리가 강한 체 한들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러니 오만을 버리세요, 아무 짝에도 못 쓰는 거예요. 그리고 남편의 발 밑에 손을 놓고 엎드려요. […]“[1]

 

여기서 그는 극중 처음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어떤 정체성에 동일시한다. ‘강한 체하거나 이맛살을 찌푸려 가며 창을 휘두르기도 했던’ 서사를 “우리”, 즉 여성의 것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카테리나는 그 서사를 실패로 읽는다. 그리고 “우리(여성)”의 몸이 처한 물리적, 감정적 특질 들 역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역설적이게도 말괄량이 스스로의 ‘여성’이라는 공표는, 한계로서의 자기 인식과 더불어 마침내 사회의 인정을 끌어낸다.

 

말괄량이는 길들여지고 만 것인가? 전시는 차라리 몇 가지 질문으로 돌아선다. 카테리나는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 ‘말괄량이’가 여성적이지 않다면, 그는 과연 남성적인가, 양성적인가, 무성적인가? 그 여자는 어떻게 여성(적)이 되어야 했는가? 전시는 500년 전 코미디를 다시 불러 세우며, 여전히 작동하는 정상성 규범의 서사와 인과적 구조, 그리고 이에 참여하는 인물의 수행적 면모를 확인한다.

 

오늘의 ‘여성’은 혐오의 대상과 미러링의 주체를 오간다. ‘여성’은 무언가를 결여한 존재로 비천시되다가도, 이미 본질주의적으로 긍정되는 여성성(여자다움; femaleness)으로 양극화한다. 사회에서 거래∙유통 가능한 형태로 (재)생산되는 ‘여성’은, 개별 신체를 재단하고 각자의 고유한 삶을 부정하기도 한다. 결혼, 취업, 대학 입시, 군복무 등 관례적 ∙ 행정적 거래를 위해서 어떤 개인은 ‘여자/여성(female/woman)’으로서 인준되지만, 어떤 ‘여성’은 거래에 끼어들 수조차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배제된다. 지금도 개인의 여성-되기는 무수히 시도되며 또 실패를 거듭한다. ‘여성’은 – 그 유구한 관습적 개념이자 규범적 가치 정립은 –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여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개인은 왜 그리고 어떻게 ‘여성’이 되는가?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오늘 이곳에서 ‘여성’이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는지 질문한다. 또, 사회적 규범에 대면한 개인이 각자의 ‘여성’을 어떻게 길들이고 있는지, 인준과 거래의 체제를 벗어나 존재할 수는 없을지 묻는다. 이때, 시각적 이미지는 정체성의 굴레를 웃도는 가상/현실의 표피를 실험할 수 있는 장으로 여겨지며, 성 규범을 넘나드는 다양한 신체와 일탈적 섹슈얼리티를 포착할 것으로 기대된다.

 

유아연은 현재의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탐구한다. 현재의 자본주의란, 계급, 지역, 성/젠더 경험에 따라 상이해질 개인의 특수성을 소거하고, 각자의 욕망과 실천을 소비 플랫폼 안에 가상적으로 평준화시키는 사태를 말한다. 이때 작업은 소비주의 플랫폼에 연동하는 퍼포머, 오브제를 자처한다. 이번 신작에서 보여주는 ‘여성’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는 실리콘 소재 바디 수트를 착용하고 부풀려진 가슴과 부드러운 ‘살’을 드러내는 누드 이미지를 연출했다. 여기서 신체는 한 겹의 평평한 레이어로 활성화되면서도 실제를 뚫고 나온다. 엷은 분홍빛의 누드는 전작 <White Mirror>(2020)에서 실시간 방영되는 폐쇄회로(cctv)에 노출되어 관객에게 관음적 시선을 강제했다. <The Triptych>(2022)는 앞선 작업의 레이어 위에 패션 화보의 구성적 형식을 겹쳐 놓는다. 신체는 폐쇄회로에서 전광판으로 옮겨지고, 소비주의의 은총 아래 매끄러운 아름다움을 덧입는다. 제목인 ‘삼단화’는 종교화에 즐겨 쓰이던 세 폭짜리 그림 양식을 가리키며, 보는 이에게 숭배와 경외, 수치심을 일으키던 효과를 상기시킨다. 이로써 유아연의 삼단화는 눈에 보이는 신체를 우상화하면서도 그에 동일시하는 관객에게 평평한 소비재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한다.

 

이나하의 신작 <아이린_190722_USF>(2022), <아이유_191123_서토콘>(2022)은 가시화의 방식으로만 활성화되는 여성 재현을 문제시한다. 아이린, 아이유로 대표되는 여자-연예인-이미지는 개인의 성적인 삶, 취향, 심지어 ‘인성’마저 가시화한다. 그에 반해 이미지 유통의 저변에서 도덕주의적 잣대를 들이미는 일반인들이나, 예외적으로 취급되는 여성동성애적 팬덤 문화는 비가시화 한다. 작가는 여자-연예인-이미지의 이러한 초가시성을 역으로 비가시화 하기 위해 해상도 조절을 전략 삼는다. 해상도의 관점에서는 스크린 면적 대비 픽셀 수가 많고 촘촘하여 주제가  선명한 이미지가 좋은 것이다. 반면, 면적 대비 밀도를 고려하지 않고 픽셀 값을 고정하면 해상도는 급격히 떨어진다. 후자의 원리로, 작가는 산업화된 캔버스의 규격인 ‘호’에 맞춰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 수를 조정한다. 가령, 120호 캔버스에서 이미지는 균일한 크기의 픽셀 12×10개로 고정된다. 리사이징 된 디지털 이미지를 캔버스로 옮기며, 작가는 한 가지 색상으로 채워진 한 개의 셀을 위해 직접 색을 섞고 덧칠한다. 때문에 질료는 스크린에서 발견되지 않던 노이즈를 남기고, 회화 이미지는 높은 채도와 무관하게 ‘저화질’이 되며, 주제는 거듭 비가시화 한다.

 

김솔이는 그가 편의상 이름 붙인 데서 시작하여 이제는 특유의 형식을 가리키게 된 ‘이미지 기립 조각’으로 전시장 내외부를 채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조각이 환기하는 직립성, 기념비성과는 거리를 두고, 공기를 가로질러 장소와 사건을 일으키는 유동적인 두께로 작동한다. 액체 상태의 라텍스나 우레탄을 드로잉하듯 그려내어 경화시키는 작업에서, 불투명하던 액체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반투명한 고체로 변한다. 고체에는 뿌리고 떨어트리고 흩트리며 그린 액체의 유동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렇듯 변이/변태를 품고 있는 것으로서 이미지-조각은, 김솔이에게 다름 아닌 감정의 사태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감정은 주체와 대상 중 어디에 속하는지,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것인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상태이며, 그러한 헷갈림 자체를 사건으로 만든다. 김솔이는 감정을 포획하는 방편으로 작업을 설명하면서 귀여움, 청승맞음, 로맨틱함과 같은 ‘여성적’ 감정의 형용에도 쉽게 매료되었다. 이번 전시의 이미지 기립 조각, <Mycelia Core>(2022) 역시 감정의 형식이자 매체로 간주된다. <Mycelia Core>는 감정 중에서도 ‘역겨움(disgust)’을 유발, 자극하는 형상으로 스스로를 가정하면서, ‘혐오’에 공모하는 인식 체계를 상상하고 의심케 한다.

 

장도은은 흙을 만지고 나무를 깎아 조각을 만든다. 거의 대부분 인체로 귀결하는 그의 조각은 귀엽지만 섬뜩하고, 친숙하지만 낯설다. 부분들이 잘려 있거나 어딘가에 결박되어 있는 사람 형상이 기이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물론, 인체 조각의 감상에 있어 양 팔이 없거나(토르소) 머리만 놓여 있는(두상) 조각은 끔찍하기보다 전통적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장도은이 만드는 몸이 이상적이거나 규범적인 상(像)을 완성시키는 일 없이 해체, 교환, 재조합을 노린다는 점이다. 하나의 얼굴은 지금과 다른 몸통에 옮겨 붙을 수 있고, 어떤 얼굴에서는 머리칼과 코가, 어떤 몸에서는 사지와 손이 떨어지고 다시 붙는다. 한편, 몸체가 자석으로 마무리되어 탈착이 자유로운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조각들은 이동을 손쉽게 하기 위한 장치를 동반한다. <조각을 옮기기 위한 캐리어_나무로 만든 두상>(2020)이나 <조각 보호를 위한 보호대_좁은 사람>(2020)과 같은 작업은 가죽, 천, 지푸라기 등으로 만들어져, 몸(조각)을 감싸고 있는 장치들이다. 옷이나 장신구처럼 보이는 이 장치들은 전체 조형의 범주에 포함되어 인체를 확장한다. 이는 타투나 피어싱을 비롯한 개별 신체의 자유로운 개조를, 페티시즘이나 사도마조히즘 플레이와 같은 도착적 섹슈얼리티 실천을 떠올리게도 한다.

 

황예지는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불)균형을 조정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이번 전시를 위해서는 피사체인 한 사람과 긴 시간 인터뷰를 진행하고 사진을 만들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거울에 비친 몸을 전체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미지를 크롭하듯 부분만 들춰보던 과거를 이야기했다. 그에게 몸은 영혼이 “잘못 들어와 있”는 장소였으며, 온전한 하나로 인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남자였던 과거와 여자로서의 현재를 완전히 화해시키지 않는다.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 여성성애자로서 그는 ‘군중의 축하를 받는다’는 의미의 새 이름으로, 다만 현재의 삶을 지속해 나가길 바라며, 사랑의 희박한 가능성을 감각한다. 그와 그의 시간은 전시에서 본인이 촬영한 사진에 담기고, 그 중에서도 정보값이 적은 사진으로 인화된 커튼(<캐노피>(2022))으로 등장한다. <회전>(2022)과 <쿼터>(2022)에서는 백색에 밀접한 암실 프린트의 불분명한 형상으로 인화지에 안착한다. 그렇게 유령의 태도로 전시장에 자리하고, 외부의 진동에 옅게 흔들리며 응시한다. 작가는 흐릿함, 여백, 노출 부족 등의 사진적 빈틈을 통해 존재가 부드럽게 자리할 수 있는 공간과 여지를 마련한다.

 

한솔은 부치의 존재 방식을 형상화하는 일군의 작업을 통해 성/젠더 규범을 재생산하는 시각성을 꼬집어 왔다. <Madele2n Love>(2022)는 대중가요를 개사, 재구성한 뮤직비디오로, K-발라드의 통속적인 로맨스 서사에 부치를 출연시킨다. ‘부치(butch)’는 레즈비언 커플에서 남성 역할을 수행하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펨(femme)’의 상대어이다. 남성적 여자, 여자-남성성을 가진 그는 자주 문제에 직면한다: 당신은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인가? 이성애중심적 젠더 이분법을 재연하려는 것인가? 그는 또 자신의 ‘여자/여성’을 입증해야 하는 곤란을 겪는다. 소위 ‘여성적’이라 여겨지는 외모와 행동 양식을 따를 필요를 의식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기를 의심하고 검열한다. <Madele2n Love>에서 주인공은 부치로서의 삶이 ‘선택’임을 강조하는데, 웃픈 현실은 숨겨지지 않고 가요의 통속성에 버무려진다. 덧붙여, 주인공 역의 배우가 드랙킹 아장맨이라는 점은 이 짧은 연극을 ‘부치’의 존재 표명 이상으로도 확인하게도 한다. 관객은 드랙(drag)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계급∙연령∙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정체성의 표면들을 돌아보게 된다.

 

이은솔은 몸 없는 머리 ‘킴벌리 리(Kimberly Lee)’를 운용하며 파괴적 해방과 공공을 위한 혁명을 설계한다. ‘킴벌리’는 작가의 개인 SNS 계정이 해킹 당하면서, 누군가 바꿔 놓은 계정의 이름이었다. 뒤늦게 해킹된 사실을 알고 나서 작가는 ‘킴벌리’를 하나의 정체(identity)이자 디지털 존재로 보존하기로 하며,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왔다. 몸 없는 머리라는 킴벌리의 상태는 가상성을 강화하는 한편, 신체를 매개로 한 존재의 소유권이나 양도권을 주장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해방을 시사한다. 몸을 삭제함으로써 그는 성별 결정을 거부하며, 자기를 거래하고 평가하게 하는 최소한의 물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Firefly>(2021)는 이러한 킴벌리의 존재 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상이다. 킴벌리는 근육의 움직임이나 색채로 표정(정동)의 차이를 드러내는 다수의 얼굴이자, 하나의 머리이다. 그는 배경이 다른 온라인 공간을 옮겨 다니며 자가 증식한다. 그리고 그것만 한다. 침대에 누운 킴벌리의 긴 하품 소리가 전체 전시장에 울려 퍼질 때, 나르시시즘적 자기 발견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하는 의지가 전달된다. 곧이어 1980년대 한국의 격동 속에 울려 퍼지던 노래 <개똥벌레(Firefly)>가 재생된다. 그 익숙한 멜로디는 운명의 복선으로 작동한다.

 

기획/글 허호정

 

 

[1] 신정옥 옮김, 『말괄량이 길들이기』(용인: 도서출판 전예원), 2014.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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