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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멘탈 Monumental》
권세진, 김성수, 김슬기, 김혜원, 윤정의, 이병호, 이소정, 전혜림, 최수련
2023.2.23.-4.22
기획, 글 l 권혁규
주최, 주관 l 뮤지엄헤드
그래픽 디자인 l 윤현학
설치 l 이병철(토탈 아트)
《Monumental》
Kwon Sejin, Kim Sung Soo, Kim Sulki, Kim Hyewon, Yun Jeong-ui, Lee ByungHo, Lee Sojung, Jun Hyerim, Choe Sooryeon
2023.2.23.-4.22
Curated by Hyukgue Kwon
Hosted and Organized by Museumhead
Graphic Design | Ted Hyunhak Yoon
Artwork Installation | Total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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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모뉴멘탈 Monumental》은 제목 그대로 기념비를 소환한다. 왜 기념비일까. 기념비의 소환은 무엇을 의도하는 것일까.
오늘 기념비는 철거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동상을 훼손하는 시위가 잇따르고, 철거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총격전을 벌이기도 한다. 심심찮게 들려오는 관련 뉴스는 오늘 기념비가 올려다볼 대상이 아니라 무너뜨릴 대상이 되었음을 알리는 듯하다.
미술에서 기념비는 외부와 단절된 매체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대문자 역사를, 그리고 그것의 무비판적 계승과 수용을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는 영원성을 추구하는 수직적 조각을, 평면성을 신뢰하는 회화를, 또 이상향을 전파하거나 선동, 선전하는 사실주의적 미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이 미술의 기념비는 역사적이고 또 문제적이다. 현대미술은 스스로 만든 기념비를 해체와 재고의 대상으로 여기곤 했다. 몇몇 담론과 실천은 기념비적인 형식의 붕해에 전념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모뉴멘탈 Monumental》의 파트너이자 상대편이라 할 수 있는 《언모뉴멘탈 Unmonumental》을 호출해 본다.[1] 2007년 뉴 뮤지엄 (New Museum)에서 열린 《언모뉴멘탈 Unmonumental》은 동시대 조각/미술이란 무엇인가, 또 그것의 새로운 ‘형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고 미술/미술관의 책무가 회의적으로 의문시되는 당시 상황에 화답했다. 2007년 소호에서 현재의 보워리(Bowery)로 장소를 옮겨 재개관한 뉴 뮤지엄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전시는 제목이 지시하는 것처럼 과거의 기념비적 미술이 쌓아온 형식주의의 아성을 배반하는 비/반-기념비를 동시대 미술의 특징으로 호명했다. 전체 4부로 이뤄진 전시 중 1부는 일상 사물들을 혼합한 ‘아상블라주’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조각, 설치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이후 열린 2부에서는 1부의 조각들을 둘러싼 전시장 벽면에 ‘콜라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평면 작업들이 (추가로) 전시됐고, 3부에서는 다시 1, 2부 전시 위에 사운드가 덧입혀졌다. 4부 ‘몽타주’는 파운드 푸티지가 돋보이는 영상 작업을 온라인에 송출했다. 그렇게 시작 시기가 다른 총 4부의 전시는 서로 겹치고 쌓여, 종국에는 하나의 아상블라주를 형성했다.[2]
위 전시의 작업들은 이질적인 재료와 물질, 내용들을 섞고 한데 뭉쳐 놓으며 기념비적이고 영웅적인 ‘형식’을 거부하거나 배반하는 경향을 보였다. 전시 서문은 ‘콜라주, 아상블라주, 몽타주’의 방식이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의 분절적, 다층적 층위를 드러내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미술의 형식뿐 아니라 보다 넓은 역사와 사회, 개인의 해체와 재/분출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임을 밝혔다.[3]
《언모뉴멘탈 Unmonumental》을 지탱하는 위 방법론은 오늘날의 비-시간적이고(a-temporal) 파편화된 작업의 양상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언모뉴멘탈 Unmonumental》에 던져진 몇 가지 비평적 질문들은 현재에도 유효하게 다가온다. 동시대 미술은 결코 하나의 양식(one style)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경향은 더욱 분열적 양상(schizophrenic)을 보이는 한편 완전한 비-형식이 아니라 정교하게 형식화되기도 한다. 나아가 그 형식은 특정한 미술사적 계보 하에서 이해되기도 한다.[4] 여기서 누군가는 비형식, 혹은 새로운 형식의 목소리를 내는 작업들에 직접적인 회의감을 표할지도 모른다. 그 전술과 방식은 더 이상 새롭지 않으며 스스로 형식(됨)을 그르치지도 않는다고, 그것은 과거의 기념비, 대문자 역사와 미술을 해체하기보다 또 다른 의미의 기념비를 계승하거나, 해체를 꿈꿨던 과거 미술을 복기하는 면모를 보인다고 말이다.[5] 조금 더 극단적으로, 그것은 문제적 기념비의 철거가 아니라 소비사회의 요구에 충실하게 응하는 어설픈 절충주의와 패치워크라고, 그저 그런 미술로 전락한 알리바이의 봉합술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늘 기념비는 무너졌는가? 기념비적 미술의 형식은 무의미한 폐기의 대상일 뿐인가? 이 질문을 축으로 《모뉴멘탈 Monumental》과 《언모뉴멘탈 Unmonumental》을 마주 놓는다. 2023년 서울에서 열리는 《모뉴멘탈 Monumental》은 당대 미술을 해체로 예시하는 과거의 시도를 다시 ‘기념비’로 불러 세운다. 기존 역사와 인식의 재고, 주변화된 개인/신체의 표출, 미술에 대한 회의적 질문과 매체의 재창안을 해체가 아닌 보다 명확한 지지체로, 일종의 변종 기념비로 제시해본다. 이번 전시에서(도) 확인되는 이어붙이기와 중첩하기의 방법, 통제 불가능한 우연성, 새로운 물질과 재료의 실험, 파운드 푸티지와 사진의 활용은 이전 사례와 같은 의도를 갖는 한편 기피된 유산이 된 미술의 형식을 가로지른다. 또 그것의 비틀어진 사용을 넘나들며 나름의 기념비를 구축한다.
여기, 이 작업들은 회화의 표면, 조각의 직립성, 창작자의 절대적 권한을 문제적으로 상속받는다. 이들은 온/오프라인의 다양한 매체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고 미술의 형식이 의심받는 현재, 자신의 지지체를 통해 무엇을 해체하고 또 조직하는지 확인시킨다. 오랜 양식과 매체 순수성의 무조건적 집착에서 벗어나 어떻게 자신만의 독특성을 견지하는지, 또 어떤 맥락을 구축하는지 살펴보게 한다.
《모뉴멘탈 Monumental》의 퀘스트는 《언모뉴멘탈 Unmonumental》과의 시간적, 물리적, 문화적 거리를 인지하며 시작된다. 전시는 그때와 지금, 그곳과 여기를 관통하는 공통의 의구심과 회의감으로부터 미세한 균열을 인지하고 문제적이며 역사적인 미술의 형식, 매체, 기념비를 다시 불러낸다. 과거를 복기하며 오늘을 고안하는 어긋난 실험들을 통해 기념비의 해체로 점철된 근과거를 다시 살피고 오늘 한국 미술의 조건과 실천을 가늠해 본다. 찰나의 모더니즘을 통과한 (어쩌면 거듭 통과 중인) 한국 미술은 기념비적 미술의 형식으로부터 무엇을 (재)발견하고 있는지, 그 형식은 어떤 공통 기반을 전제하고, 어떤 거리를 조정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모든 것이 가상공간에 연루되는 오늘, 기념비적 미술은 어떻게 물질과 이미지, 신체를 드러내는지, 또 과거 서구 미술이 주요 미술공간을 차지한 현재의 풍경 속에서 한국적 기념비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확인해본다.
《모뉴멘탈 Monumental》은 과거 미술/형식이 가진 절대적 위상의 회복을 꾀하지 않는다. (혹은 하지 못한다.) 전시는 미술의 찬가를 부르는 날들이 오늘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아득한 시공임을 알고 있다. 기념비를 말하는 전시는 오히려 스스로를 개조하는 일이 여전히 급진적인 조건이 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과거를 재확인,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차와 간극을 소스 삼아 변태하는 기념비를 축조하는 일. 그 기념비를 살짝 올려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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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진 회화 속 장소와 풍경은 알 수 없는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한다. 그중 ‘수면(水面)’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경험적이고 관념적인 공간이다. 작업에서 그것은 광활한 세계의 표면이자 바깥을 반사하는 막, 또는 회화의 평면성을 실험하는 장소로 나타난다. 일례로 <바다를 구성하는 2223개의 드로잉>(2020)에서 작가는 작은 먹 드로잉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드넓은 수면을 이미지화한다. 이 그림은 균일한 완성도의 수많은 드로잉들로 구성되며, 전체 화면은 과거 두루마리 그림과 동양화의 이동 시점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Yellow Line>(2021)으로도 이어져, 먹지를 이용해 탁본하듯 그려진 부분의 음영은 프린트하듯 넓게 칠해진 기본색에 조응하며 하나의 화면을 완성한다.
김성수가 공간 앞마당에 설치한 대형 철제 조각은 과거 기마장군상과 같은 영웅적 기념비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스테인리스와 동판을 잘라 해머로 두들겨 곡면을 만드는 단조의 과정은, 또 개별 판을 일일이 이어 붙이는 용접의 방식은 장엄하고 매끈한 위용보다는 수공의 세밀함과 고강도의 노동이 맞붙은 흔적을 드러낸다. 동물에 올라탄 인물상(들)의 형상과 서사는 작가가 직접 만든 일종의 스토리보드에 기인한다. 작가는 유년시절 그렸던 만화나 자주 읽었던 동화를 차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픽션을 구성하고 현재를 유비한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이루는 기억과 경험, 상상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 작업은 거대 단일 서사에 기반한 영웅적 기념비를 우회한다.
김슬기는 시대를 횡단하는 대상의 현재와 그 서사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아크릴과 MDF, 석고 등을 재료로 동아시아 신화 속 동물인 용을 만들고 광장에 자리한 분수의 익숙한 도상들과 고대의 부조를 재형상화한다. 이때, 서로 다른 문화와 서사의 시간성이 교차된다. 일종의 ‘토템’으로 상정된 현재의 물질은 영적인 숭배 대상으로 올려지는 듯하지만, 쉴 새 없이 이미지를 투사하는 도시 문명의 지독한 가변성과 속도 등을 표상하며 별도의 이야기와 두께를 드러낸다. 작가의 손과 신체를 거친, 영원성과 초월성을 환기하는 현재의 물질과 형상은 오늘로 운반된 오랜 서사와 믿음을, 동시대 소비사회의 물신화된 상품의 위상과 기능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김혜원의 회화는 얼핏 디지털 이미지의 재현에 몰두하는 듯 보인다. 스마트 폰으로 찍은 사진을 그리는 작업은 드라마틱한 붓질이나 개인의 감정 표현을 최소화한 매뉴얼과 프로세스를 설정한다. 그림의 대상 역시 지하철역의 공중 전화기와 자판기, 시내버스의 내부처럼 액자에 들어가기에는 어딘지 평범하고 희미한 장면들이다. 하지만 작업은 디지털 사진의 픽셀이나 해상도와는 다른 회화의 표면과 물질, (심지어는) 사건을 드러낸다. 수채화로 이미지의 바탕을 잡고 과슈와 아라비아 고무액을 섞어 표면에 얹히는 과정은 그만의 회화적 (혹은 공예적) 형상과 층위를 만들며 재현과의 결탁을 해제한다. 그리고 그 해제는 색과 물성, 시점과 거리, 손과 신체의 움직임 같은 회화의 과정과 경험을 의식한다.
윤정의는 물질을 깎아 형상을 만드는 조각 행위와 덧붙이고 쌓아 올려 형태를 짓는 소조 행위를 아우르는 조소의 운용을 실험한다. 덩어리를 만드는 물질과 헤집고 썰고 뭉갠 흔적이 한데 엉켜 있는 조각은 그 대상과 과정의 나타남을 교란하며 주변의 잔상과 간극을 그러모은다. 인체의 부분과 전체, 평면과 입체, 작은 조각과 큰 조각을 왕래하는 작업은, 또 흙덩어리가 가마에서 소성되는 과정은 시차와 변형의 경위 자체에 주목하고 그것 그대로를 조각 행위에 포함시킨다. 전시장에 직립한 조각은 고정된 형상과 내용을 지시하기보다 내부와 외부, 뼈대와 살, 나와 대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완결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녹아들고 변위하는 물질의 간극을 형상화한다.
이병호는 로댕의 방법론을 참조하며 하나의 오롯한 몸이 될 수 없는, 부분들로 조합된 인체 조각을 선보여 왔다. 또 기존 작품을 완성된 원본으로 두기보다 절단, 복제, 재조합하여 다른 작품을 만들어 내는 등 위 방법론을 신체뿐 아니라 작업 전반에 적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최근 디지털 복제와 3D 프린팅을 통해 더욱 확장되었는데, 작가는 2020년 이후 <Eccentric Abattis>를 위해 자신의 이전 작업을 3D 스캔하여 스케일을 조정하고 그 부분들을 떼어내 추상적 형태를 보여주거나 한데 뭉쳐 조합했다. 이번 전시의 <Eccentric Scene>(2023)에서는 역으로 3D 스캔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 이미 복제/조합된 – 신체를 다시 가져온다. 그리고 역시 스캔/조정된 덩어리에 조합하며 자기 방법론의 무한 서클을 재확인한다.
이소정의 회화는 서로 다른 세계를 (때론 모순적으로) 교차시킨다. 그간 작가는 먹의 우연적 효과를 배제하는 먹의 사용을 실험했고, 익숙한 기호에 자동 발생적 이미지를 포개 놓기도 했다. 최근 작업은 물감이 번지고 스며드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개인의 경험에 빗대며, 그것을 필연적 이미지로 되돌려 놓는다. 이전에 사용했던 종이를 먹에 적셔 화면에 찍어 우연을 복제하고, 아크릴 물감을 동양화 물감과 아울러 쓰며 형상을 정리한다. 밀랍을 활용해 화면 뒷면의 일정한 패턴과 앞면의 우연적 형상을 동시에 드러내기도 한다. 다양한 회화의 방식과 재료, 개념을 오가는 작업은 규정된 매체와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미지의 증식을, 확장하는 평면의 사태를 조율한다.
전혜림은 이전 회화의 도상과 구성 방식을 일종의 오픈소스로 채택한다. 이상화된 공간을 그린 중국의 산수화와 그리스의 아르카디아 풍경화를 비롯해 선명한 색조의 우키요에와 이발소 그림, 심지어는 만화 원피스까지, 전혜림의 회화는 특정 시대와 문화의 회화/방법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개별 소스가 상정하는 필법이나 관념을 충실하게 따르기보다 그 자체를 차용하는데 주력하며, 결과적으로 못 그린, 무근본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재해석된 곽희, 구영, 티에풀로는 화면에서 작가의 선택에 의해 분해되고 초과의 시제 안에서 부활한다. 그렇게 작가는 각각의 소스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을 시각적으로 지시함과 동시에 기존 위계와 위상을 배반하며 입체적 시간을 가늠해본다.
최수련은 흔히 고전이나 전통으로 여겨지는 대상들을 낯설고 기묘한 이미지로 등장시킨다. 동아시아 설화 속 선녀는 작가의 작업에서 다재다능하면서도 정숙한 여성이 아닌, 음산하고 때론 비애 가득한 인물로 나타난다. 이 밖에도 작가는 황당무계한 고전 설화를 성실하게 해석하고 필사하는가 하면, 즐겨봤던 (주로 중화권)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과 대사를 베껴 그린다. 이를 통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전통적 이미지/서사의 구조를, 또 그를 지탱하는 고정관념을 생경하게 드러낸다. 작업은 한자와 고전 이미지/설화처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을 학습하고 모방하는 듯하지만,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의 초시간성과 부조리함을 동시에 드러내 보이며, 결국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의 면면을 유령처럼 소환해낸다.
기획/글 권혁규
[1] 《언모뉴멘탈 Unmonumental》은 리처드 플러드Richard Flood, 로라 홉트만Laura Hoptman,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가 공동 기획하였다.
[2] 전체 4부의 기획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 1. Unmonumental: The Object in the 21st Century (2007.12.01.-2008.03.30.)
– 2. Collage: The Unmonumental Picture (2008.01.16.-03.30.)
– 3. The Sound of Things: Unmonumental Audio (2008.02.13.-03.30.)
– 4. Montage: Unmonumental Online (2008.02.15.-03.30.)
[3] Richard Flood, Laura Hoptman, Massimiliano Gioni, Unmonumental: the object in the 21st century (London; New York: Phaidon in association with New Museum, 2007)
[4] 이와 관련해 평론가 로베르타 스미스는 《언모뉴멘탈 Unmonumental》이 완결된 형태나 유통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다와 초현실주의 등 반-미술 조류를 상기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또, 매끈한 마감이나 스펙터클적 보여주기 방식이 아닌 거친 마감과 미숙함(Un skill)을 드러내는 면모는 아르떼 포베라(Arte Povera) 등과 연결 지을 수 있고, 파운드 이미지 등을 활용해 복제하고 재조합하는 방식은 팝 아트와 연결해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Roberta Smith, “[Art Review: ‘UNMONUMENTAL’] In Galleries, a Nervy Opening Volley,” NY Times (Nov. 30, 2007), https://www.nytimes.com/2007/11/30/arts/design/30newm.html
[5] 《언모뉴멘탈 Unmonumental》을 기획한 큐레이터 중 한 명인 로라 홉트만은 해당 전시가 1961년 MoMA에서 당대 미술의 한 경향을 ‘아상블라주’로 집대성하여 보여준 전시 《The Art of Assemblage》 (1961. 윌리엄 자이츠William Seitz 기획)의 계보를 잇는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후에 홉트만은 MoMA에서 20세기 미술의 전통을 재발견하는 회화의 현재를 선보인 전시 《Forever now: Contemporary Painting in an Atemporal World》 (2014.12.14.-2015.4.5.)를 기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