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홀홀 HoleHoleHole

 
《홀홀홀 HoleHoleHole》
염지혜 개인전
2026.07.07-08.15.
12:00-19:00 (일, 월 휴관)
그래픽 디자인: 인현진
사운드 디자인: 오희원, 조현령
전시 설치: 붐붐파
미디어: 아워레이보
도움: 김한슬
주최, 주관: 뮤지엄헤드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2026

 

 

구멍구멍구멍

 

구멍의 정체는 무엇인가? ‘구멍’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멍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동시에 모든 것이 통과하도록 내버려두는 기표다. 하지만 이 기표는 바로 그 텅 빔으로 말미암아, 말장난 같은 사유의 전환을, 비논리적인 도약을 유도한다. ‘구멍’을 지나는 순간 세계의 배열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염지혜는 갖가지 구멍을 가설한다. 구멍을 통과하며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해서 저기로 옮겨가고, 논리의 비약과 감정의 전이가 수시로 일어난다. 비물질과 물질을 오가는 물리적이고 위상적인 변화는 작품의 지지체 층위에서도 나타난다. 작가의 기존 작업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이러한 이동들이 익숙하기도 한 한편 낯설기도 할 것이다. 작가는 친절한 설명에 앞서는 감각적 · 감정적 반응을 제안한다.

 

우선, 전시장을 가로지르며 놓인 네 개의 검은 기둥에서 출발하자. 이 기둥의 패널 양면엔 영상을 송출하는 스크린과 오일 페인팅, 조각들이 배치돼 있다. 이들을 아우르는 중심에는 영상 〈지구내장구멍〉(2026)이 있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촬영한 푸티지와 AI 생성 이미지를 함께 사용해 내러티브를 완성했다. 영상은 인체 소화기관의 일부가 플라스틱 관으로 교체되는 경우를 예로 들어 상상을 시작한다. 유기체의 꿀렁꿀렁한 운동이 부분적으로 멈추면서 일어나는 불/가능을 가정하면서 말이다.

 

매끈하게 교체된 통로로 생을 연장한 유기체는 세계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가? 혹은, 그는 세계와 함께 어떻게 변화하는가? 작가는 입과 항문을 연결하는 기다란 관으로 신체를 형상화하며 각각의 개체-관과, 그것을 또 삼켜 안고 있는 거대한 내장-터널-지구를 상상한다. 그리고 전시는 인체와 지구라는 상이한 스케일을 하나로 이을 구멍들을 가설하며 스스로 이를 관통하려 한다.

 

구멍과 구멍 사이에 어떤 연결이 시도된다. 주의해야 할 점은, 그러한 연결을 이해하기 전에, 그간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특정한 사고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내외, 비/인간, 동과 서, 너와 나,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를 지우고, 사회학 · 경제학 · 지질학 · 생물학 등 각종 분과 학문의 격리된 태도를 버려야 한다. 여기서 사고의 전환은, 흔히 떠올릴 만한 간학제적 교류나 ‘하이브리드’ 정도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도약을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문화적 정체성은 진화생물학적인 고려와 대립하기보다 동시에 공존하는 한에서 재배치될 수 있어야 한다. 또, 몸의 비/기능 · 비/장애 (dis/ability)는 각각이 수태되는 순간부터 섭취하는 모든 물질—식품, 약품, 여타 화학물질, 심지어 공기(오염) 호흡 등 인지하기 어려운 수준의 물질성—의 층위를 고려하면서 관찰되어야 한다.[1]

이러한 사고 전환을 위해 전시가 집중하는 주요 모티프는 ‘소화’의 현상이다. 작가가 섬유질, 발효 세균 등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신진대사를 전시의 한 축에 배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술지게미와 생막걸리를 섞어 벽에 쓴 시는 전시장 가장 안쪽 공간에서 쿰쿰한 냄새를 자아낸다. 비슷한 냄새는 전시장 가운데 패널에서도 드문드문 느껴지는데, 거기 놓인 조각들도 술지게미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작업에 쓰인 재료는 특정한 온도와 습도 등에 반응하여 분해와 생성을 지속하고 있다. 작업의 형성 중에도 지금도 계속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하고, 공기 중의 냄새와 색의 입자를 미세하게 바꾸기도 한다. 나아가 이를 호흡하는 관객의 몸도 바꾸는 중이다. 그렇게 소화는, 들어오고 나가는 것과 들고나는 통로(장소이자 환경)를 모두 변화시킨다.

 

염지혜는 소화의 작용으로 이해된 세계 속에 인간을 위치시킨다. 가령, 술지게미와 흙으로 만들어진 조각이 “호모 볼루스”라 불린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그는 인류의 학명인 ‘호모(homo)’에 ‘덩어리, 흙덩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 ‘볼루스(bolus)’를 조합해 제목을 붙였다. 그런데 ‘볼루스’는 생리학 용어로 침과 섞여서 목구멍으로 막 넘어갈 참인 ‘음식물 덩어리’를 가리키며, 의학에서는 한 번에 집중적으로 약물을 주입(injection)하는 방식이나 그 약물을 말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제목은 더욱 흥미로워지는데, 작품 자체의 위상이 그러하듯 그 이름이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삽입과 배출, 생산과 소비 등의 양가성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양가성은 전시의 또 다른 축에서 작동하는 소화불량의 장면에서 극화된다. 교체된 플라스틱 내장과 생뚱맞게 등장하는 플라스틱 빨대, 야생성을 희미하게 간직한 이빨의 도상이 이를 환기하며, 수많은 포털에도 이동하지 못하고 루프에 걸린 채인 출구 없는 이미지 구조는(〈지구내장구멍〉(2026)과 〈지구터널〉(2011)을 보라.) 그 자체 소화불량을 양식화한다. 이러한 장면은 앞서 유기물들이 보여준 ‘소화’의 운동 방식을 방해하는 듯하고, 활발하고 자연스러운 생의 장면을 어딘지 어색하고 부적합한 움직임으로 바꾸어 놓기까지 한다. 특히, 〈지구내장구멍〉은 유기체의 움직이는 내장-감각을 생생히 재현해내는 경우에도, 스스로가 전자기적 신호로 이루어진 비물질적 이미지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완벽히 통제된 듯 보이는 (AI 이미지 생성) 시스템 속에서 글리치와 각종 오류들을 동시에 감지한다.

 

하지만, 이로써 작가가 ‘자연과 인위, 생기와 생기 없음’의 대조나 우열을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낙관이나 비관 없이, 전시는 삼키고 삼켜지는 소화작용을 유기체-비유기체, 물질-비물질을 관장하는 동일한 운동으로 위치시킨다. 그리고 세계-내-존재들의 관계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분해된다. 이로써 《홀홀홀 HoleHoleHole》은 술지게미와 생막걸리, 짐승의 이빨, 야외 공간에 우뚝 선 나무 따위가 상징하는 ‘생명’ 내지는 ‘자연’을, ‘대지의 모성’ 류의 위대함으로 가져가기보다는 인간이 초래하고 또 영향받은 역사적 맥락에 재배치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시에서 다뤄지는 또 한 가지 이야기는, 서구 중심의 인류 문명사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혹은 특정한 방향으로 조정되고 있는 역사적 구멍들에 관한 것이다. 작가는 10여 년 전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 체류했던 경험에 기반해 서로 다른 이야기, 물질, 식생, 문화를 연결한다. 가령, 전시장 입구에 위치한 〈크랙〉(2026)은 작가가 2012년 한 레지던시에 체류했던 콜롬비아의 칼리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이미지를 겹쳐 놓는다. 이들 지역은 세계 ‘마약’ 문제의 온상으로 여겨진다. 오랫동안 미국은 자국의 마약 문제를, 콜롬비아를 비롯한 중남미 지역에서의 유입 문제로 돌려왔다. 그리고 이들 지역의 마약 ‘생산’ 자체를 줄이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전쟁’과 같은 폭력을 정당화해왔다.[2] 이 문제가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한편, 자국의 몇몇 도시로 취약 계층이 계속 유입되고 중독자들과 중독에 의한 사망자 수가 늘어나는 상황은 방치되었다. 악명 높은 ‘좀비 도시’의 출현은 ‘해악 감소 정책’의 이름으로 중독자들을 소극적으로 지원하는 태도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3] 이처럼 인류의 거대한 구멍이 계속해서 또 다른 구멍을, 크랙을(크랙은 ‘코카인’의 은어이기도 하다.) 낳는 광경은 콜롬비아에서 온 작은 조각(〈크랙크랙크랙〉, 2012)과 ‘좀비 도시’의 이미지, 죽지도 살지도 않은 짐승을 그린 그림(〈언데드〉, 2025)으로 제시된다.

 

영상 〈지구터널〉(2011)은 작가가 2010년 가나에서 만난 이란 출신 친구의 집을 직접 방문하면서 제작됐다. 영상엔 런던과 서울을 편히 오고 가기 위해 지구를 관통하는 터널을 만들기로 한 ‘과학자’가 등장한다. 투명 빨대를 꺼내 들어 지구본에 대어 보는 과학자의 공상은, 자로 지도에 선을 긋던 제국주의자의 손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물론, 영상의 골자는 이 프로젝트가 불시착과 함께 실패한다는 데에 있다. 인도를 찾아 배를 끌던 콜럼버스가 미대륙에 부딪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런던에서 서울을 향하며 터널을 뚫던 ‘과학자’는 이란 땅에 도달한다. 이란은 1979년, 오래된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에 의해 통치되는 이슬람 공화국이 설립된 이래, 반인권적 탄압과 반민주적 소통 등으로 내홍을 겪어 왔다.[4] 그런 한편, 2010년 작가가 방문했을 당시 이란의 지정학적 상황은 2002년 조지 W. 부시의 ‘악의 축’ 선언 이후 응축된 긴장 상황에 놓여 있었고, 이는 2025년 미-이스라엘 침공으로 인한 현재의 전쟁과 겹쳐진다.[5] 이 작업에서 작가는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찍은 푸티지와 각종 보도사진을 원형으로 중첩하며, 수십 년에 걸친 봉합되지 않는 갈등을 반(反)가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동서’로 세계를 양분하고 이를 ‘횡단’하길 꿈꾸는 안일한 태도—내재된 제국주의—는 자조적으로 비판되고, 유보된 판단 속에서 개인의 안위는 버블 속에 담겼다 사라진다.

 

《홀홀홀 HoleHoleHole》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의 시급성을 호소하고, 긴급한 대처를 논하는 전시는 아니다. 루프된 이미지, 유사성의 감각을 전하는 도상, 서로 경계가 나뉘지 않는 작품들과 전시장의 배배 꼬인 동선은 반복 속에 어떤 연결의 감각을 노출시킬 뿐이다. 미국과 콜롬비아, 이란의 과거와 현재는, 여태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있는 미-이스라엘이 주도한 전쟁으로 연결되고, 자기 죽은 몸에 흙을 덮어줄 사람을 찾던 영화(〈체리 향기〉, 1997)는 이미 죽은 예술가(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집을 부수는 무도한 폭력과 겹치며,[6] 구덩이 위를 덮는 체리 나무 대신, 구덩이 옆에 몸을 세운 오늘 이곳의 대추나무가(〈대추나무와 구덩이〉, 2026) 서로 다른 생을 연결하며 열매를 틔운다.

 

우리는 이러한 연결에 또 질문을 붙여볼 수 있다. 나를 지키는 치안이 무방비 상태의 타인을 폭력에 내버려둔 결과라면, 겉보기에 무해하고 실용적으로 보이는 물건과 가구를 사용하는 일이 반대편의 들끓는 재해를 유발한다면, 저곳의 애도가 이곳의 자유를 희생하고, 이곳의 저항이 저곳의 억압이라면? 이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다면?

 

시제를 달리하는 사건들이 현재의 지평 위에 이따금 구멍을 낸다. 그리고 이 같은 구멍들의 노출은 논리적 위계와 구별을 압도하는 ‘철저한 연결’을 제안한다. 크랙과 빈 칸을 점점이 이은 망은 여기저기를 가로지른다. 중심이 흔들리고, 들어온 것과 나가는 것을 함께 오염시키는 통로의 법칙이 유일하게 남은 논리다. ‘구멍’은 텅 빈 자리를 채우지 않는다. 하지만 게워내고 삼키며 씹고 뱉는 운동을 지속한다.

 

 

허호정 (뮤지엄헤드 책임큐레이터)

 

 

[1] 이러한 구성적 세계관은, 문학, 페미니즘, 환경정의 등을 연구하는 학자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에 의해 제안된 ‘횡단-신체성’을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앨러이모는 실재적이고도 물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몸(실재성)과 그에 얽힌 이야기(서사성), 그리고 개별적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이해되는 집합성을 한꺼번에 이해하기 위해 사고의 전환을 제안한다. 앨러이모는 인본주의적 ‘장소’ 개념이나,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그 용례 대신, 재정의된 ‘환경’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다음을 참고: 스테이시 앨러이모 (윤준, 김종갑 옮김), 『말, 살, 흙』(그린비, 2018).

[2] 톰 베넷, 「베네수엘라 이후 트럼프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BBC NEWS 코리아』, 세계면 (2026-01-06):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y8y9e99y7lo .

[3] 김송이, 유경선, 「마약에 삼킨 ‘좀비도시’ 가보니… 길에서 새 주사기 나눠주고 있었다」, 『경향신문』, 사회면 (2024-10-28): https://www.khan.co.kr/article/202410280600121 .

[4] 박지우, 강유진, 문성호, 조준수, 「이슬람 정권 아니었다면 한국처럼 발전했을 텐데”… 이란의 한탄」, 『토끼풀』 인터뷰 (2026-05-01): https://www.tokipul.net/news/articleView.html?idxno=1118

[5] 정우량, 「이란은 왜 ‘惡의 축’인가」, 『중앙일보』, 정치면 (2002-02-18): https://www.joongang.co.kr/article/4227897 .

[6] 곽진산, 「황금종려상 키아로스타미 감독 집도 폭탄 세례… 이란 “문화·정체성 겨냥” 비판」, 『한겨레』, 국제면 (2026-03-25):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251075.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