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메 NAME

 

 

《나메 Name》

곽이브, 류성실, 이유성, 이환희, 정수정, 최이다, 최하늘

2020.12.3. – 2021.2.7.

기획: 권혁규

그래픽 디자인: 윤현학

테크니션: 최민석

주최: 뮤지엄헤드

 

《Name》

Eve Kwak, Sungsil Ryu, Eu Sung Lee, Fanhee Lee, Soojung Jung, Iida Choi, Heneyl Choi

03.DEC.2020.-07.FEB.2021.

Text / Curating : Hyukgue Kwon

Graphic Design : Ted Hyunhak Yoon

Artwork Installation : Minseok Choi

Hosted by Museumhead

 

 

 

로미오, 그대는 왜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부인하고 그대 이름을 거부해요.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중

 

이름은 나와 당신을 구분한다. 세례명부터 추도문까지 그것은 여러 존재와 세계를 나누고 명명한다.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으며, 스스럼없이 식별 (불)가능한 무언가를 굳건히 하는 체계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희곡의 대사처럼 손도 아니며, 발도, 팔도, 얼굴도 될 수 없다. 이름이 아니라도 세상은, 또 사람은 그대로 마찬가지다. 나와 무관하게, 타인에게 부여받은 기호가 구별해내는 것은 결국 나와 외부의 당신뿐 아니라 나와 다른 무수히 많은 나이기도 하다. 이름은 국적, 성별, 연령, 인종처럼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조건으로, 어긋난 정체성의 기표로 나를 쫓아내고 다시 제한하길 반복한다.

 

그래서 ‘나’는 이름을 이리저리 옮기고 수많은 괄호를 추가하며 어긋남을 재조정해왔을 것이다. 그것은 근거 없이 요구되는 임무와 고정된 정체성을 갱신하려는 시도였고 동의하지 않는 힘의 구조가 나로부터 작동하고 있진 않는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늘 이름의 주권을 행사하는 나는 모든 것이 되돌아오는 올림푸스 산에 갇힌 개인처럼 추진력을 잃고 서서히 잠적해 버린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늘 구분과 다름, 존중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다름도 존중도 아닌 개인(self)의 무조건적 분출과 수용일 것이다. 얼핏 들으면 우아하기까지 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란 이름으로 터뜨려진 세계 없음의 상황은 나를 열렬히 지지함과 동시에 내 존재성을 집어삼켜버린다.

 

대량생산 시대에 범람하는 것은 물질세계의 상품만이 아니다. 나는 마치 예술, 정치, 종교처럼 넘쳐흐르며 점점 무화된다. sns를 채우는 뜬금없는 자기애와 연민, 정신병적 망상과 혐오는 바로 옆 개나 고양이 사진만도 못한 유용함을 자랑하고, 그 위 대문에 걸린 언제든 폭파, 복제 가능한 이름은 끊임없이 퇴거하는 소동을 가리키는 임시 표지판처럼 존재한다. 여기에 온라인과 비대면 환경, 기술적 진보와 통제의 요구로 가득한 2020년, 이름은 무의미의 폭발로 또다시 제거되는 듯하다. 이름과 신체가 무의미해지는 시대에 개인은 거처의 상실을 받아들여야만 할까. 이제 총체화할 수 없는 시간에 정주하는 레디메이드로서의 개인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놔야 할 때인가.

 

곽이브, 류성실, 이유성, 이환희, 정수정, 최이다, 최하늘. <나메 Name>는 이들의 이름에서 시작된다. 전시는 개인에게 부여된 어긋난 기표, 이름을 작업의 출발로 제안한다. 이름을 조형하기를 요청받은 작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일부를 밝히고 무엇을 어떻게 시각화할지, 또 그것을 어떤 맥락에 위치시킬지 결정한다. 전시는 나와 외부, 나와 나를 구분하는 이름을 각색해 미술의 오랜 주제인 자화상과 연결하고 그 각색의 전략을 드러내며 전시/공연된 개인을 보다 분명한 지평에서 재확인하도록 한다.

 

전시는 실체 없는 세계 속 개인의 자의식 과잉, 자아 탐색의 낭만주의적 시도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서 시작한다. 옹호하지 않는 곳을 출발점으로 삼으며 공연자로서의 개인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들의 정체성 연출을 감히 독려한다. 작가는 자신의 일부를 연출해 전시하고 관객은 그것이 제작, 가공된 것임을 알면서도 작가의 자아 혹은 개인적 무엇과 연결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개인은 말 그대로 전시의 결과물이지 원인 그 자체, 그러니까 순수 자아라고 할 순 없다. 전시의 개인/이름은 연출된 무대에서 구성된 극적 효과에 가까운 것이다.

 

전시는 결국 ‘연출된 자아/개인’의 창작을 초대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연출과 전시, 공연의 개념은 비도덕적이고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인은 그것이 연출된 것이든 실제이든 모두 특정 상황과 조건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실현된다. 전시의 이름-개인은 연출자로서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충실하게 심지어 도덕적으로 스스로를 기술한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고립된 단독자나 낭만적 개인/주체가 아니라 외부 조건과의 관계로, 또 분명한 미술의 매체와 내용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개인을 파악하고 그가 다른 주체들과 어떻게 섞이며 어떤 현재를 구성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를 통해, 오늘이 거의 단념했던 분명한 존재를 그려보게 된다. 이처럼 전시는 시대의 전형처럼 다가오는 정체성의 연극을 무의미로부터 끄집어내 오늘에 개입하는 주체를 분명한 맥락에서 바라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 실체를 알 수 없는 현재를 다원성의 분출이 아닌 당대적 주체의 사고로 가늠해보자고 말한다.

 

<나메 Name>는 이름에게 이름을 묻는다. 희곡의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이름은 개인의 마스크가 되곤 한다. 전시 작가들은 이름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미술에 대해 생각하고 설명하며 각색한다. 또 그것을 거부하고 일어나 달리고 욕을 한다. 이들이 전시하는 이름(의 뒷면)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기를 바란다. 매끈하게 정돈된 사회와 개인의 메커니즘을 잠시나마 뒤집어보는 가면놀이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전체와 맞물려있지 않은 어긋난 이름을 발견하기를, 그렇게 오늘을 사고하는 여러 개인의 변주곡으로, 스스로를 종결하지 않는 존재가 활성화되는 공간으로 전시를 인지해보길 바란다.

 

우리는 멸종된 공룡의 이름을 발명하고 빠르게 질주하는 자동차도 열심히 포착하지 않는가.

 

* * *

 

곽이브는 다양한 종류의 박스와 담는 것, 건축물에 관심을 갖고 무언가를 만지고 보관하는, 또 들춰보고 기억하는 테와 틀, 공간을 만들어왔다. 그것은 분명한 이미지와 물질로 가득 찬 창고라기보다 내용물로 과잉되지 않은, 경계가 밀쳐지고 확장된 ‘자리’나 ‘터’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무언가의 틀이 되는 종이 인쇄물 <곽이브>를 내놓는다. 그리고 그 틀은 이번에도 구획된 표준을 넘어 저 바깥의 또 다른 시공으로 연결된다. <곽이브>는 A2 사이즈의 통일된 규격 용지에 ‘곽이브’라는 이름을 음소 단위로 나눠 그린 후 여러 장을 이어 붙여 벽면을 도배하듯 채운 작업이다. 소리 낼 수 있지만 의미가 사라진 형태들은 서로 결합되고 이어지며 새로운 의미로, 또 감상 가능한 도상으로 만들어진다. “이름은 아는 사람에게 의미 있고” 형태는 관심 갖는 이에게 포착된다.(작가노트) 무언가의 틀이 된 인쇄물은 시멘트와 유리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전시장 벽에 붙으며 공간의 형태와 성질을 또 다른 테 혹은 곽으로 받아들인다. 전시장 밖 겨울의 색을 데려온 듯한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은 오늘에서 연장된, 앞과 뒤가 같은 이브(eve)의 시간처럼 특정 인상이나 경험을 다른 시공으로 이동시킨다. 현재의 무엇은 규격 용지의 음소 단위들처럼 끊어지지 않고 테와 틀, 공간으로 잇대어진다.

 

류성실은 부계혈통 사회의 토템처럼 이름을 소개한다. 작가에게 이름은 죽음을 이어달려 온 가족주의와 가부장적 위계의 상징물과 같다. 00류 씨 00파 00대손으로 태어나 ‘성실’이란 이름을 받은 작가는 한국의 여느 자식들처럼 비범한 사람이 되어 가문의 이름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그리고 전혀 비범하지 않은 이름을 지어준 조상의 심보에 의구심을 갖는다. 전시장에 설치된 모니터 속 QR코드를 스캔해 영상 페이지에 접속하면 갈라지고 깨진 8비트 게임 캐릭터 같은 노인을 만나게 된다. 8비트 특유의 퀄리티와 감성 때문인지, 만나는 순간 조상임을 깨닫게 하는 노인은 엘리베이터에서 곰삭은 농담을 던진다. 그 농담은 “너는 훌륭한 역관을 배출하고 예술적 조예가 깊은 가문의 지혜를 물려받은 후손으로서 항상 자부심을 느끼고 감사해야 한다”라는 말처럼 황당하고 어이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친근하고 애잔하게 우습다. 또 이름이란 완장을 채우고 사명감을 갖게 한 조상들은 이 모양 이 꼴인 자식들을 위해 무엇을 돌보고 있는지, 아직도 후손들을 앞세워 죽음을 극복한 입신양명을 꿈꾸는지 묻게 된다. 미워할 자신 없는, 날 닮았을지 모르는 시체는 그렇게 자기 복제와 번식을 멈추지 않는 좀비가 되어 K 세속화를 호객하는 QR코드를 뿌린다. <죽지 않는 가문>의 8비트 조상은 스마트폰으로 대를 잇는다.

 

이유성은 단단하고 분명한 외곽선을 가진 물질들을 새로운 동세와 시간감을 가진 오브제로 인식한다. 어떤 대상이 언어와 이미지로 지각된다면, 그건 문자와 감각이 다수의 대상으로 확장 적용되며 일종의 일반 관념으로 견고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와 이미지의 지시성은 여러 대상의 공통된 성질을 추상적으로 일반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유성은 일반화된 불명확성을 구체적인 물질과 형상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작업을 자신의 이름 ‘유성’과 연결한다. 이번 전시의 <감속 컨테이너>, <잠자리 스피드>는 모두 속도와 이동성을 갖는 오브제를 재료로 포함한다. 작업에서 그것들은 이동하는 대신 멈춰있고 정박되어 있다. 이들은 의 스키부츠처럼 버려진 내달림일 수도, 다이내믹함을 뽐내는 순간의 절단면이자 열어젖힌 가능성일 수도 있다. 또 마스크 쓴 작가의 야간 러닝이 끌어올린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는 현재의 아쉬움이자 열망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업은 전시장 한쪽에서 반짝이는 작은 <유성>처럼 서로 다른 감각과 이야기를 맞대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퍼뜨리길 상상한다. 일반화된 불명확성을 분명한 분열로 이끄는 이 과정은 무언가를 만지고 깎는, 또 조형하는 행위로 지지된다. 대기권에 들어와 순간의 빛을 그리는 유성은 소유 불가능하지만 누구나 볼 수 있고 기원을 투사하는 채굴의 대상이자 주인이 된다.

 

이환희는 이미지와 관계 맺는 의미 체계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회화의 평면과 형식, 조형을 탐색한다. 작가가 “완전한 태세”로 설명하는 이 회화 혹은 표면의 환희는 다양한 미술의 물질과 형식, 역사를 경유하지만 궁극적으로 관련 맥락을 모두 소거하는 것을 목표로 실체화된다. 의미를 탈락시키려는 조형과 형식에게 이름을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완전한 태세를 쫓아 만들어진 표면은 어떻게 스스로를 정의할까.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동안 지속해온 조형 게임의 과정을 총체화해 보여준다. 먼저 작가는 임의의 비례를 가진 사각형에 이전 작업(들)의 핵심 조형을 수집, 승계하는 스케치 하나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 스케치를 새로운 회화 화면에 안착시키는 방식을 고민하고 해당 모티프의 비례와 배치 등을 조절하며 나름의 조형성을 만들어낸다. 제2, 제3의 화면과 표면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결국 이전 작업의 핵심을 시각화함과 동시에 그곳에서 미세하게 어긋나는 움직임을 드러내며 보다 완전한, 새로운 태세로 이동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식물의 잎이나 줄기를 잘라 식물체를 번식시키는 꺾꽂이에 비유한다. 완전한 태세는 결국 과거의 조형을 재고하고 재창안하기를 반복하며 조형(만)의 인덱스를 구축하는 (반)역사적 프로토콜임이 밝혀진다.

 

정수정은 쉽게 설명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에 개인의 상상을 가미하여 회화의 장면을 구상한다. 작가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와 뉴스, 가십거리는 작업의 이미지를 만들고 다층적 시간과 서사를 조합하는 원천으로 기능한다.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작업에서 이들은 기존 범례와 사유를 초월한 미스터리한 대상으로 또 상상적 영웅이나 빌런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외부 사건뿐 아니라 자기 내부의 동요에 집중하며 여성의 이미지를 그려간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동물들과 함께 질주하는 여성들은 피륙 따위가 주는 역할의 불편함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꽃으로 가득한, 생명력 넘치는 세계를 헤집는다. 이와 함께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날개들은 답답한 현재에서 언제든 벗어날 수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위에서 내려다 본 듯한 화면과 얇게 여러 번 발린, 흐르는 물감의 효과는 기록 영상과 비슷한 사실성과 현장감을 전달하며 시점의 거리감을 줄인다. 그렇게 가까이 마주한 화면은 일종의 심리적 거리감까지도 덜어내며 타인에게 이미지의 실제가 되는 지점을 상상하도록 한다. 정수정의 작업은 주로 여성의 것으로 간주되는 수정이란 이름을 또 그 이름의 주인인 자신을 이전과 다른 세계에 위치시킨다.

 

최이다는 이름 없는 창조물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름이 필요한 목소리로부터 답장을 받는다. 수신자가 공백인 편지를 준비하며 시작하는 (2015)는 이름에 대한 여러 단상을 공유하며 선택하지 않은 이름이 물신화한 개인의 역할에, 또 그것의 질문 없는 적용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편지의 수신자는 자신을 만든 박사의 이름 ‘프랑켄슈타인’으로 기억되는 생명체이다. (2020)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조차 잊은 어느 날 누군가에게 받은 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이 분한 목소리는 자신의 이름을 거부한 발신자, ‘이다’를 찾아가 ‘속이 맑고 아름답다’라는 뜻의 ‘리아裡雅’라는 이름을 양도받는다. 속이 꽉 찬 목소리, 리아는 이제 믿을만한 세상을 되찾기 위해 하룻강아지 같은 인간들의 껍데기를 사냥한다. 별다른 뜻이 없는, 서술격 조사 이다의 ‘ㅣ’와 ‘ㅏ’를 공유하는, 또 프랑켄슈타인의 불안을 극복한 리아에게 이름은 역할극이 아니라 게임의 장치에 가깝다. 이름의 규칙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안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 뒤러의 코뿔소를 죽이고 운명의 횡단보도를 건넌 리아에게 이름은 또 다른 시간을 선취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물론 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욕으로 쓴 것에 분노한 하룻강아지들을 조심해야 한다.

 

최하늘은 이름에서 시작한 두 개의 조각을 마주 보게 놓는다. 모자를 쓰고 스티로폼 커팅기를 손에 든, 남성 조각가로 보이는 <형식을 창조하는 자>는 반대편의 <형식을 파괴하는 자>에게 엿을 날린다. 그 엿은 조각인 척하는 것들을 향한 울화일 수도, 혹은 자기 작업에 대한 환멸일 수도 있다. 두 조각은 서로 포개질 수 없는 흔히 말하는 구상과 추상의 세계에 위치한다. 둘은 창조와 파괴, 형식과 내용, 이동과 정지, 왼쪽과 오른쪽처럼 완전히 일치될 수 없는 운명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두 조각은 동시에 응시된다. 한 시야에 들어온 조각(들)은 오브제에서부터 구상, 추상으로의, 또 일종의 기본값이라 할 수 있는 프라이머 회색에서부터 오돌토돌한 표면과 핑크색으로의 중층적 흐름을 드러내며 실존의 형상과 예술적 조작을, 또 패션과 미용술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이제 둘 사이의 손가락 욕은 서로 다른 세계를 아우르는 어떤 명쾌한 의도로 다가온다. 작업은 철수와 영희로 대변되는 이름의 이분법적 성별에서 벗어난 하늘이 두 세계를 횡단하며, 또 동시 채택하며 이종을 만드는 조각적 시도로 혹은 선언으로 이해된다. 같은 모양으로 포개질 수 없는 작가의 양손이 서로를 부단히 맞닥뜨리며 만들어 낸 조각은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이분법의 불합리함을 끝내버리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기획/글 권혁규

 

 

NAME

 

Oh Romeo, Romeo! Wherefore art thou Romeo? Deny thy father and refuse thy name.

– From Romeo and Juliet (William Shakespeare)

 

 

A name distinguishes a person from someone else. From baptismal names to memorial speeches, names categorize innumerable beings and, ultimately, the world. A name does not age with the passing of time. Rather, it endures as a system that solidifies the identity of things that can (or, sometimes, cannot) be identified.

 

Nevertheless, as the line in a famous play goes, it cannot be a hand, foot, arm, or face. Even if a person changes their name, the person and the world that they inhabit are the same. The “marker” that I am given, regardless of my wishes, to differentiate me from someone else not only divides me from the other person: it is also a collective term for a person and their many other internal selves. A name, based on many conditions (like nationality, gender, age, and race) that somehow always feel foreign, alternately chases us down and tries to convince us to accept it—the marker of an identity that does not feel like it is mine.

 

The self has, over the years, changed names many times and, in some cases, gained a string of parenthetic additions. During this time, it has also constantly adjusted (with success or failure) to the discrepancies between it and one or more of its names—an attempt to update the gaps between groundless demands and the fixed identity and a constant questioning of whether this forced hierarchy of power is coming from oneself. Today, the self, which technically is the agent of one’s name, is—like Sisyphus having to roll a stone up a hill for eternity, only to have it come back to him each time—losing impetus. In a pluralistic society, the individual is always the subject of categorization, a state of “being different,” and respect. The problem is neither being different nor respect but the indiscriminate eruption (and acceptance) of the self. Neoliberalism and globalization, two recently-exploded bombs that sound sophisticated and rational, take on two contradictory roles: they ardently support the self while also swallowing the self’s identity.

 

The age of mass production does not overflow only with material goods. It is also inundated with “mes,” which, like art, politics, and religion, become incapacitated the more they flow out. Social media declarations of self-love, pity, hate and delusions have far less value than photos of kittens and puppies. The name that hangs above all of these things—which can be destroyed or replicated at will—is like a temporary sign which implies that the account’s owner can leave the social media stratosphere any time. In the year 2020, a moment in time replete with contactless/online environments and demands for the advancement (and control) of technology, the name is again being dispelled through an explosion of meaninglessness. In an age in which names and bodies are increasingly stripped of meaning, does the individual have to passively accept the loss of one’s home? Do we have to become accustomed to the dreary idea of the “ready-made person,” who is existing in minutes and hours that can no longer be generalized?

 

Name begins with the names of its featured artists—Eve Kwak, Sungsil Ryu, Eu Sung Lee, Fanhee Lee, Soojung Jung, Iida Choi, and Heneyl Choi—and starts from the name: the ill-fitting ID that is given to the individual. The artists, who were simply asked to create something on their name, reveal, in their unique ways, a part of themselves. They decide what to visualize, how to visualize it, and the context in which that part of themselves will be put into. The exhibition adapts the concept of the name as a divider of the self with the outside and other selves to an old visual art format: the self-portrait. Through the display of the strategies employed for such adaptations, visitors can explore the exhibited/performed self more clearly.

 

The exhibition does not unconditionally advocate excessive displays of private egos or romantic attempts at self-exploration in an immaterial world. But this is where it begins. By starting at a point that the exhibition does not support, the exhibition acknowledges the artists as individual “performers” and encourages the stage direction of their work. The artist stages a part of themselves for an exhibition: the visitor, even after knowing that the display is staged, associates it with the artist’s ego or something personal. In this case, the self is nothing more than exhibition-geared output. It is not the “real” ego. In a conventional exhibition, the self/name is much closer to a dramatic stage effect.

 

Ultimately, an exhibition is a collection of staged egos/selves. Does this, then, mean that “staging,” “exhibition,” and “performances” are problematic and unethical? Whether staged or not, the individual is revealed while closely intertwined with a certain situation or conditions. This exhibition’s title implies that, by showing the artist as a stage director, it actually strives to describe the self with complete honesty in a very dedicated and ethical way. The visitor is not an isolated being or romantic individual/agent: they become acquainted with the concrete self, which is revealed through its relationships with outside factors or art-related mediums and see how this self exists alongside other agents and how it lives here and now. Through this self, the visitor can visualize an entity who is very real and concrete, despite having been rejected by our times. As such, the exhibition does two things: 1) identify the meaninglessness of the “dramatization of identity,” which is increasingly becoming a prototypical format of the 21st century, to re-position the self as an agent in a concrete context who intervenes in what happens here and now and 2) invite us to see the present age—immaterial swaths of time that defy definition—not as an outpouring of pluralism but the thought process of an agent who is very much a product of their times.

 

Name asks the name its name. Even if not a character in a play, a person’s name often serves as a mask. The featured artists, through their names, offer explanations of themselves and their art. They also reject and denounce their names. I hope visitors take some time to imagine these names (and what is behind them). I hope they can, by flipping over (if only briefly) the “mask”—the mechanisms of society in the individual that are well-manicured on the outside—discover the points at which artists’ names do not fit perfectly into the framework required by society. I hope that they see this exhibition as a space that displays variations of individuals who live in the here and now and in which individuals who do not declare a death sentence on themselves are revitalized. We take time to invent names for extinct dinosaurs and to photograph racing cars. Isn’t the premise of this exhibition, then, also worthy of our time?

 

Eve Kwak is interested in boxes, containers, and buildings, based on which she creates frameworks and spaces that touch, store, look at the underside of, and remember various objects. They are not so much storage containers that are filled with concrete images or objects, but “lots” or spaces” that are not overfilling with content and whose boundaries are easily altered. In this exhibition, Kwak features printing paper, which is usually used as the framework for something else in KWAKeve. The framework she presents is, as always, the doorway to a different space and time that spreads beyond conventional standards/partitions. KWAKeve is made up of sheets of A2 paper, each of which has been partially cut into the vowels and consonants (in Hangeul) that spell the artist’s name and then taped to the wall so that their sides touch. The shapes, which still represent sounds but are stripped of meaning, take on new meanings by being juxtaposed in Kwak’s way and collectively create something that museumgoers can appreciate as “art.” As she states in her Artist’s Note (“A name only has meaning to someone who knows it”), an object’s shape is distinguishable only if one takes an interest in said object. Paper that is used as a backdrop, when attached to the solid, similarly-colored walls of the exhibition venue, is both the main character and something that is able to “frame” its surroundings. The artwork, which has brought winter’s gray inside the art museum, take impressions and experiences that are not yet over or have been extended—like the time of Eve (whose name is a palindrome)—into a new space and time. Things in our present, like the vowels and consonants in Kwak’s artwork, are not solitary objects. They are linked to one another as outlines, frames, and spaces.

 

Sungsil Ryu presents her name as a totem, like the ones used by premodern, patrilineal societies. For Ryu, a person’s name is a symbol of the familial and patriarchal system that is imbued with a power that transcends even death. The artist, who is listed in her family tree as a member of a particular sect of a certain generation of a certain sect of the Ryu clan, was told from a young age—like many Korean children—that she must become an extraordinary person who brings honor to the family name. She began to question this dictum after realizing that the name she was given is far from lofty or extraordinary. If you scan the QR code that appears in the monitor and access the page that appears, you will see an old man who look like a character from an outdated childhood video game. This 80s/90s arcade game aesthetic makes it abundantly clear that the old man is a long-dead ancestor. He makes a few jokes that are as trite as the edict often stressed to Korean children (along the lines of “you must, as the descendant of a family that has produced a long line of scholars and is innately blessed with an eye for the arts, always be thankful and proud to be a member of the 00 family”) but, somehow, makes us laugh at them. This character also makes us think about what, if anything, our ancestors, for whom their surname was a badge of pride and honor, have done for their modern-day descendants and whether they still, even in the afterlife, dream of achieving prosperity through their children’s children. The character, with whom visitors will find themselves mildly exasperated with but, at the same time, unable to write off completely and wonder whether it is a future version of themselves, keeps replicating himself while scattering QR codes that promote worldly goals. In this respect, the kitschy ancestor in Never Ending Family continues the family line via smartphone.

 

Eu Sung Lee sees a new movement and sense of time in objects that are sturdy and have a clear outline. If something is perceived through language and image, it is because it has, through the proliferation and application of written language and visual sensitivity to a large number of people, become established as a widely-accepted notion. In other words, the referential power of language and images is the outcome of an abstract generalization of the characteristics that multiple subjects have in common. Lee links the act of converting generalized unclearness into concrete objects/shapes with his name, Eu Sung (the pronunciation is usually spelled “yuseong,” which means “meteor” or “shooting star”). Decceleration Container and Dragonfly Speed, both of which are featured in this exhibition, are made with objects that represent speed and mobility. In Lee’s works, these objects are suspended in motion. Like the ski boots of Slow Love, they can be a love of racing that was discarded long ago, a cross-section of a fleeting moment of dynamism, or a wide-open world of potential. Or, like Lee’s night runs that he does while wearing a mask, they may be our disappointment about the difficulty of movement (caused by the COVID-19 pandemic). Lee’s work is like a small shooting star in one corner of the exhibition venue. It makes us think about what it would be like to share our stories and experiences with one another and then re-disperse in different directions. The work of turning generalized unclearness into clearly-visible division is supported by the acts of making, carving, cutting, and shaping. A shooting star, which draws an arc of light as soon as it enters the stratosphere, cannot be owned. It can, however, be seen by anyone or prayed to for good luck.

 

Fanhee Lee explores the two-dimensionality, formats, and three-dimensionality of painting that relegate the relationship between image and a system of meaning to second-class status. The rapture (fanhee, or hwanhee, means “rapture” in Korean) of the painting or surface that Lee describes as the “perfect form” refers to different materials and formats and has a different history per artistic genre: all, however, ultimately share the goal of ridding the artwork of context. If you were to ask a shape or format that is being shed of meaning what its name is, what would it say? How would a surface that was made with the goal of perfection of form/shape define itself? In this exhibition, Lee offers visitors a summary of the “shape game” that he has played with his art thus far. First, the artist makes a sketch on a rectangle (of arbitrary proportions) of several key shapes from his previous artworks. In the process of transferring the sketch to a canvas, he adjusts the dimensions and locations of the shapes to create a sense of dimensionality. This process, which can require Lee to go through more than one canvas, simultaneously visualizes key elements of his previous work while revealing the minute discrepancies of movement that occur with each successive canvas to achieve a new shape that is closer to perfection than the last. Lee compares the process to a cutting (plant’s leaf or stem that is cut off and planted elsewhere for propagation), ultimately showing that the perfect shape is an (anti)-historical protocol in which shapes of the past are repeatedly improved or re-designed to create an “index” of shapes.

 

Soojung Jung’s paintings blend events that are difficult to understand or explain with the artist’s imaginings. Accidents reported on the news, incidents in Jung’s daily environment, and subjects of gossip are the source from which Jung draws the images she will use to establish a multi-layered world of time and discourse. The people who are involved in these accidents are mostly women. In Jung’s paintings, they appear as mysterious beings (such as an imaginary hero or villain) who transcends conventional “cases/examples” or notions. For this exhibition, Jung focused not on outside incidents but her inner turmoil as the basis for her images of women. Several women in wedding dresses run alongside animals—in complete disregard for the inconvenience of long, flowing fabric—through a world teeming with flowers and wildlife. The area occupied by the bird, which takes up half of the canvas, seems to show, with its entire body, that they can leave the disappointing present world whenever they wish. The aerial perspective and the lightly applied layers of flowing paint create a sense of video footage-like reality and temporality that reduces the “height” from which the subjects were painted. By being able to see half of the painting (the bird) from up-close, the viewer will feel less psychological distance with the subjects and, thereby, be able to focus on imagining what the women are running toward or feeling—as their faces are just barely hidden from view. Jung’s work relocates the word “sujeong” (which means “crystal” in Korean but is also a common female name) and the owner of this name—herself—within a very different world.

 

Iida Choi’s art sends epistles to nameless creations and receives answers from unnamed voices. Entitled (2015), which began as a letter to an unnamed recipient, shares the artist’s ideas about what is entailed by a named. A name not selected by one’s will reveals a reification of the individual and rejection of its enforcement. The recipient is “Frankenstein,” a life form that is remembered by the name of its creator. Calling (2020) is a reply received for the long-forgotten letter from an unknown person. Someone who does not appear on the screen states a Korean saying: “A tiger leaves its hide when it dies, but a person leaves his name.” The person seeks out the letter’s sender, “Iida,” who rejected her name, and receives instead the new name “Lia (裡雅).” Lia’s name shares the same Hangeul consonants (‘ㅣ’ and ‘ㅏ’) as “Iida,” a predicative particle: in other words, a word that has no meaning on its own. For Lia, who has overcome the fear of Frankenstein, a name is not role play: rather, it is much like a game. The rules that are associated with names/naming are still valid, but there is no longer anyone to answer the question of who the name’s agent is. For Lia, who has killed Albrecht Dürer’s Rhinoceros and crossed the crosswalk of fate, a name is nothing more than a device to gain time. Lia will, of course, have to be wary of the foolish people who are enraged by the use of their name as a profanity.

 

Heneyl Choi’s work is made up of two statues on his name (heneyl means “sky” in Korean and is also a common male or female name) that have been positioned to face one another. The Creator of Form: Standard, which seems to be a male sculptor wearing a baseball hat and holding a Styrofoam cutter in one hand, raises his middle finger at The Destroyer of Form: Bulky. The obscene gesture may be directed to those things that pretend to be sculptures or an expression of disillusionment about his profession. The two sculptures each represent the formative and abstract worlds—two worlds that cannot overlap. At first glance, the two seem to be on parallel tracks, like creation and destruction, format and content, movement and stopping, and left and right.

 

Kwon Hyuk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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