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메 NAME

 

로미오, 그대는 왜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부인하고 그대 이름을 거부해요.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중

 

이름은 나와 당신을 구분한다. 세례명부터 추도문까지 그것은 여러 존재와 세계를 나누고 명명한다.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으며, 스스럼없이 식별 (불)가능한 무언가를 굳건히 하는 체계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희곡의 대사처럼 손도 아니며, 발도, 팔도, 얼굴도 될 수 없다. 이름이 아니라도 세상은, 또 사람은 그대로 마찬가지다. 나와 무관하게, 타인에게 부여받은 기호가 구별해내는 것은 결국 나와 외부의 당신뿐 아니라 나와 다른 무수히 많은 나이기도 하다. 이름은 국적, 성별, 연령, 인종처럼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조건으로, 어긋난 정체성의 기표로 나를 쫓아내고 다시 제한하길 반복한다.

 

그래서 ‘나’는 이름을 이리저리 옮기고 수많은 괄호를 추가하며 어긋남을 재조정해왔을 것이다. 그것은 근거 없이 요구되는 임무와 고정된 정체성을 갱신하려는 시도였고 동의하지 않는 힘의 구조가 나로부터 작동하고 있진 않는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늘 이름의 주권을 행사하는 나는 모든 것이 되돌아오는 올림푸스 산에 갇힌 개인처럼 추진력을 잃고 서서히 잠적해 버린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늘 구분과 다름, 존중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다름도 존중도 아닌 개인(self)의 무조건적 분출과 수용일 것이다. 얼핏 들으면 우아하기까지 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란 이름으로 터뜨려진 세계 없음의 상황은 나를 열렬히 지지함과 동시에 내 존재성을 집어삼켜버린다.

 

대량생산 시대에 범람하는 것은 물질세계의 상품만이 아니다. 나는 마치 예술, 정치, 종교처럼 넘쳐흐르며 점점 무화된다. sns를 채우는 뜬금없는 자기애와 연민, 정신병적 망상과 혐오는 바로 옆 개나 고양이 사진만도 못한 유용함을 자랑하고, 그 위 대문에 걸린 언제든 폭파, 복제 가능한 이름은 끊임없이 퇴거하는 소동을 가리키는 임시 표지판처럼 존재한다. 여기에 온라인과 비대면 환경, 기술적 진보와 통제의 요구로 가득한 2020년, 이름은 무의미의 폭발로 또다시 제거되는 듯하다. 이름과 신체가 무의미해지는 시대에 개인은 거처의 상실을 받아들여야만 할까. 이제 총체화할 수 없는 시간에 정주하는 레디메이드로서의 개인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놔야 할 때인가.

 

곽이브, 류성실, 이유성, 이환희, 정수정, 최이다, 최하늘. <나메 Name>는 이들의 이름에서 시작된다. 전시는 개인에게 부여된 어긋난 기표, 이름을 작업의 출발로 제안한다. 이름을 조형하기를 요청받은 작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일부를 밝히고 무엇을 어떻게 시각화할지, 또 그것을 어떤 맥락에 위치시킬지 결정한다. 전시는 나와 외부, 나와 나를 구분하는 이름을 각색해 미술의 오랜 주제인 자화상과 연결하고 그 각색의 전략을 드러내며 전시/공연된 개인을 보다 분명한 지평에서 재확인하도록 한다.

 

전시는 실체 없는 세계 속 개인의 자의식 과잉, 자아 탐색의 낭만주의적 시도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서 시작한다. 옹호하지 않는 곳을 출발점으로 삼으며 공연자로서의 개인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들의 정체성 연출을 감히 독려한다. 작가는 자신의 일부를 연출해 전시하고 관객은 그것이 제작, 가공된 것임을 알면서도 작가의 자아 혹은 개인적 무엇과 연결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개인은 말 그대로 전시의 결과물이지 원인 그 자체, 그러니까 순수 자아라고 할 순 없다. 전시의 개인/이름은 연출된 무대에서 구성된 극적 효과에 가까운 것이다.

 

전시는 결국 ‘연출된 자아/개인’의 창작을 초대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연출과 전시, 공연의 개념은 비도덕적이고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인은 그것이 연출된 것이든 실제이든 모두 특정 상황과 조건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실현된다. 전시의 이름-개인은 연출자로서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충실하게 심지어 도덕적으로 스스로를 기술한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고립된 단독자나 낭만적 개인/주체가 아니라 외부 조건과의 관계로, 또 분명한 미술의 매체와 내용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개인을 파악하고 그가 다른 주체들과 어떻게 섞이며 어떤 현재를 구성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를 통해, 오늘이 거의 단념했던 분명한 존재를 그려보게 된다. 이처럼 전시는 시대의 전형처럼 다가오는 정체성의 연극을 무의미로부터 끄집어내 오늘에 개입하는 주체를 분명한 맥락에서 바라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 실체를 알 수 없는 현재를 다원성의 분출이 아닌 당대적 주체의 사고로 가늠해보자고 말한다.

 

<나메 Name>는 이름에게 이름을 묻는다. 희곡의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이름은 개인의 마스크가 되곤 한다. 전시 작가들은 이름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미술에 대해 생각하고 설명하며 각색한다. 또 그것을 거부하고 일어나 달리고 욕을 한다. 이들이 전시하는 이름(의 뒷면)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기를 바란다. 매끈하게 정돈된 사회와 개인의 메커니즘을 잠시나마 뒤집어보는 가면놀이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전체와 맞물려있지 않은 어긋난 이름을 발견하기를, 그렇게 오늘을 사고하는 여러 개인의 변주곡으로, 스스로를 종결하지 않는 존재가 활성화되는 공간으로 전시를 인지해보길 바란다.

 

우리는 멸종된 공룡의 이름을 발명하고 빠르게 질주하는 자동차도 열심히 포착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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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이브는 다양한 종류의 박스와 담는 것, 건축물에 관심을 갖고 무언가를 만지고 보관하는, 또 들춰보고 기억하는 테와 틀, 공간을 만들어왔다. 그것은 분명한 이미지와 물질로 가득 찬 창고라기보다 내용물로 과잉되지 않은, 경계가 밀쳐지고 확장된 ‘자리’나 ‘터’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무언가의 틀이 되는 종이 인쇄물 <곽이브>를 내놓는다. 그리고 그 틀은 이번에도 구획된 표준을 넘어 저 바깥의 또 다른 시공으로 연결된다. <곽이브>는 A2 사이즈의 통일된 규격 용지에 ‘곽이브’라는 이름을 음소 단위로 나눠 그린 후 여러 장을 이어 붙여 벽면을 도배하듯 채운 작업이다. 소리 낼 수 있지만 의미가 사라진 형태들은 서로 결합되고 이어지며 새로운 의미로, 또 감상 가능한 도상으로 만들어진다. “이름은 아는 사람에게 의미 있고” 형태는 관심 갖는 이에게 포착된다.(작가노트) 무언가의 틀이 된 인쇄물은 시멘트와 유리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전시장 벽에 붙으며 공간의 형태와 성질을 또 다른 테 혹은 곽으로 받아들인다. 전시장 밖 겨울의 색을 데려온 듯한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은 오늘에서 연장된, 앞과 뒤가 같은 이브(eve)의 시간처럼 특정 인상이나 경험을 다른 시공으로 이동시킨다. 현재의 무엇은 규격 용지의 음소 단위들처럼 끊어지지 않고 테와 틀, 공간으로 잇대어진다.

 

류성실은 부계혈통 사회의 토템처럼 이름을 소개한다. 작가에게 이름은 죽음을 이어달려 온 가족주의와 가부장적 위계의 상징물과 같다. 00류 씨 00파 00대손으로 태어나 ‘성실’이란 이름을 받은 작가는 한국의 여느 자식들처럼 비범한 사람이 되어 가문의 이름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그리고 전혀 비범하지 않은 이름을 지어준 조상의 심보에 의구심을 갖는다. 전시장에 설치된 모니터 속 QR코드를 스캔해 영상 페이지에 접속하면 갈라지고 깨진 8비트 게임 캐릭터 같은 노인을 만나게 된다. 8비트 특유의 퀄리티와 감성 때문인지, 만나는 순간 조상임을 깨닫게 하는 노인은 엘리베이터에서 곰삭은 농담을 던진다. 그 농담은 “너는 훌륭한 역관을 배출하고 예술적 조예가 깊은 가문의 지혜를 물려받은 후손으로서 항상 자부심을 느끼고 감사해야 한다”라는 말처럼 황당하고 어이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친근하고 애잔하게 우습다. 또 이름이란 완장을 채우고 사명감을 갖게 한 조상들은 이 모양 이 꼴인 자식들을 위해 무엇을 돌보고 있는지, 아직도 후손들을 앞세워 죽음을 극복한 입신양명을 꿈꾸는지 묻게 된다. 미워할 자신 없는, 날 닮았을지 모르는 시체는 그렇게 자기 복제와 번식을 멈추지 않는 좀비가 되어 K 세속화를 호객하는 QR코드를 뿌린다. <죽지 않는 가문>의 8비트 조상은 스마트폰으로 대를 잇는다.

 

이유성은 단단하고 분명한 외곽선을 가진 물질들을 새로운 동세와 시간감을 가진 오브제로 인식한다. 어떤 대상이 언어와 이미지로 지각된다면, 그건 문자와 감각이 다수의 대상으로 확장 적용되며 일종의 일반 관념으로 견고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와 이미지의 지시성은 여러 대상의 공통된 성질을 추상적으로 일반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유성은 일반화된 불명확성을 구체적인 물질과 형상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작업을 자신의 이름 ‘유성’과 연결한다. 이번 전시의 <감속 컨테이너>, <잠자리 스피드>는 모두 속도와 이동성을 갖는 오브제를 재료로 포함한다. 작업에서 그것들은 이동하는 대신 멈춰있고 정박되어 있다. 이들은 의 스키부츠처럼 버려진 내달림일 수도, 다이내믹함을 뽐내는 순간의 절단면이자 열어젖힌 가능성일 수도 있다. 또 마스크 쓴 작가의 야간 러닝이 끌어올린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는 현재의 아쉬움이자 열망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업은 전시장 한쪽에서 반짝이는 작은 <유성>처럼 서로 다른 감각과 이야기를 맞대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퍼뜨리길 상상한다. 일반화된 불명확성을 분명한 분열로 이끄는 이 과정은 무언가를 만지고 깎는, 또 조형하는 행위로 지지된다. 대기권에 들어와 순간의 빛을 그리는 유성은 소유 불가능하지만 누구나 볼 수 있고 기원을 투사하는 채굴의 대상이자 주인이 된다.

 

이환희는 이미지와 관계 맺는 의미 체계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회화의 평면과 형식, 조형을 탐색한다. 작가가 “완전한 태세”로 설명하는 이 회화 혹은 표면의 환희는 다양한 미술의 물질과 형식, 역사를 경유하지만 궁극적으로 관련 맥락을 모두 소거하는 것을 목표로 실체화된다. 의미를 탈락시키려는 조형과 형식에게 이름을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완전한 태세를 쫓아 만들어진 표면은 어떻게 스스로를 정의할까.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동안 지속해온 조형 게임의 과정을 총체화해 보여준다. 먼저 작가는 임의의 비례를 가진 사각형에 이전 작업(들)의 핵심 조형을 수집, 승계하는 스케치 하나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 스케치를 새로운 회화 화면에 안착시키는 방식을 고민하고 해당 모티프의 비례와 배치 등을 조절하며 나름의 조형성을 만들어낸다. 제2, 제3의 화면과 표면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결국 이전 작업의 핵심을 시각화함과 동시에 그곳에서 미세하게 어긋나는 움직임을 드러내며 보다 완전한, 새로운 태세로 이동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식물의 잎이나 줄기를 잘라 식물체를 번식시키는 꺾꽂이에 비유한다. 완전한 태세는 결국 과거의 조형을 재고하고 재창안하기를 반복하며 조형(만)의 인덱스를 구축하는 (반)역사적 프로토콜임이 밝혀진다.

 

정수정은 쉽게 설명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에 개인의 상상을 가미하여 회화의 장면을 구상한다. 작가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와 뉴스, 가십거리는 작업의 이미지를 만들고 다층적 시간과 서사를 조합하는 원천으로 기능한다.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작업에서 이들은 기존 범례와 사유를 초월한 미스터리한 대상으로 또 상상적 영웅이나 빌런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외부 사건뿐 아니라 자기 내부의 동요에 집중하며 여성의 이미지를 그려간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동물들과 함께 질주하는 여성들은 피륙 따위가 주는 역할의 불편함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꽃으로 가득한, 생명력 넘치는 세계를 헤집는다. 이와 함께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날개들은 답답한 현재에서 언제든 벗어날 수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위에서 내려다 본 듯한 화면과 얇게 여러 번 발린, 흐르는 물감의 효과는 기록 영상과 비슷한 사실성과 현장감을 전달하며 시점의 거리감을 줄인다. 그렇게 가까이 마주한 화면은 일종의 심리적 거리감까지도 덜어내며 타인에게 이미지의 실제가 되는 지점을 상상하도록 한다. 정수정의 작업은 주로 여성의 것으로 간주되는 수정이란 이름을 또 그 이름의 주인인 자신을 이전과 다른 세계에 위치시킨다.

 

최이다는 이름 없는 창조물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름이 필요한 목소리로부터 답장을 받는다. 수신자가 공백인 편지를 준비하며 시작하는 (2015)는 이름에 대한 여러 단상을 공유하며 선택하지 않은 이름이 물신화한 개인의 역할에, 또 그것의 질문 없는 적용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편지의 수신자는 자신을 만든 박사의 이름 ‘프랑켄슈타인’으로 기억되는 생명체이다. (2020)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조차 잊은 어느 날 누군가에게 받은 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이 분한 목소리는 자신의 이름을 거부한 발신자, ‘이다’를 찾아가 ‘속이 맑고 아름답다’라는 뜻의 ‘리아裡雅’라는 이름을 양도받는다. 속이 꽉 찬 목소리, 리아는 이제 믿을만한 세상을 되찾기 위해 하룻강아지 같은 인간들의 껍데기를 사냥한다. 별다른 뜻이 없는, 서술격 조사 이다의 ‘ㅣ’와 ‘ㅏ’를 공유하는, 또 프랑켄슈타인의 불안을 극복한 리아에게 이름은 역할극이 아니라 게임의 장치에 가깝다. 이름의 규칙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안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 뒤러의 코뿔소를 죽이고 운명의 횡단보도를 건넌 리아에게 이름은 또 다른 시간을 선취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물론 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욕으로 쓴 것에 분노한 하룻강아지들을 조심해야 한다.

 

최하늘은 이름에서 시작한 두 개의 조각을 마주 보게 놓는다. 모자를 쓰고 스티로폼 커팅기를 손에 든, 남성 조각가로 보이는 <형식을 창조하는 자>는 반대편의 <형식을 파괴하는 자>에게 엿을 날린다. 그 엿은 조각인 척하는 것들을 향한 울화일 수도, 혹은 자기 작업에 대한 환멸일 수도 있다. 두 조각은 서로 포개질 수 없는 흔히 말하는 구상과 추상의 세계에 위치한다. 둘은 창조와 파괴, 형식과 내용, 이동과 정지, 왼쪽과 오른쪽처럼 완전히 일치될 수 없는 운명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두 조각은 동시에 응시된다. 한 시야에 들어온 조각(들)은 오브제에서부터 구상, 추상으로의, 또 일종의 기본값이라 할 수 있는 프라이머 회색에서부터 오돌토돌한 표면과 핑크색으로의 중층적 흐름을 드러내며 실존의 형상과 예술적 조작을, 또 패션과 미용술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이제 둘 사이의 손가락 욕은 서로 다른 세계를 아우르는 어떤 명쾌한 의도로 다가온다. 작업은 철수와 영희로 대변되는 이름의 이분법적 성별에서 벗어난 하늘이 두 세계를 횡단하며, 또 동시 채택하며 이종을 만드는 조각적 시도로 혹은 선언으로 이해된다. 같은 모양으로 포개질 수 없는 작가의 양손이 서로를 부단히 맞닥뜨리며 만들어 낸 조각은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이분법의 불합리함을 끝내버리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기획/글 권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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